일상 속에서, 일상에 대하여 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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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닥터필로스 작성일18-03-31 13:53 조회3,5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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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일상에 대하여 철학하기
에바 졸러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놀라움으로부터 철학하기는 시작된다고 하였다. 어느 날인가 아주 평범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마음에 담아 두게 되면서부터 철학하기는 시작된다. 우리가 감탄하고 놀라며 의문을 가지는 순간부터 그것은 그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것도 당연한 것도 더 이상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단어를 하나 예로 들어보자. “부드러운 것은 정말 부드러울까?” 기차놀이를 하던 다섯 살짜리 꼬마는 갑자기 의아해졌다. “하필이면 왜 그렇게 부를까?” 또 조금은 억지스러운 깨달음도 있다. 요슈타인 가더의 청소년을 위한 철학 소설 <소피의 세계>에서 소피가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교사 알베르또에게 얘기한다. “제가 도착했을 때 선생님이 안 계신 것을 봤어요.” 알베르또가 다시 묻는다. “있지 않는 것을 너는 어떻게 볼 수 있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면서도, 우리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저 공간이 도무지 끝이 없다는 사실은 신비롭고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많은 것을 배워 알고 있는 우리 어른보다 어린이들에게 훨씬 더 자주 일어나는 이 놀라움은 무엇인가를 일깨운다. 바로 이 놀라움과 더불어 철학하기는 시작된다.
철학하기는 바로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반성이며, 그 결과물이 새로운 앎이요, 더 나은 이해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전을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철학하기의 또 다른 뿌리는 데카르트가 철학하기의 방법으로 얘기했듯이 의문을 갖는 것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그저 꿈꾸고 있을 뿐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하고 그 동안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소망이 막 이루어진 열한 살짜리 소녀는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생각과 빗나간 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자주 실망해 왔던가?
오락 영화나 기록 영화 등 화면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는 가상 현실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우리가 의심 없이 현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더욱 실감난다. 철학하기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실에 거듭해서 의심을 품는 것이고, 그저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사실의 이면에 제2, 제3의 다른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철학하기를 통하여 우리는 실질적으로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하므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학하기를 통하여 우리는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또다시 새로운 의문점을 찾아야 하며 거듭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되는 질문에 끝이 있기는 할까?
우리가 제시한 질문이 분명하고 절대적으로 객관성을 지니는 정확한 대답으로 해결된다면, 아마 우리는 정말로 철학적인 질문과 씨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질문의 한계가 계속해서 넓어진다는 것이 바로 철학하기의 매력이다. 훌륭하게 진행된 철학적 토론에서는 어떠한 사실의 새로운 측면이 부단히 나타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의 복잡미묘함과 무수한 다양성을 깨닫게 된다. 토론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전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분명해졌다는 것이 느껴진다면, 그때서야 우리는 철학하기의 목적으로서 소위 ‘분명하게 밝히기’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매일매일 하는 토론과 철학적 대화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점은, 우리가 다루는 질문 사항과 아이디어의 근본을 캐는 끈기의 정도 차이다. 친구와 수다를 떨 때는 기분과 흥미에 따라 이 화제에서 저 화제로 옮겨 다닐 수 있지만, 철학하기에서 우리는 그저 단순한 생각을 교환하는 단계를 지나서 한걸음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제시된 질문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때까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측면과 통찰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앎이 얻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도 수렴할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고, 저 자신이 보기에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다시 캐물어 볼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연결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 진정한 대화의 장이란 서로가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는 것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은 물론 시비를 가름하고 추측하며 근거를 제시해야 가능하다. 또한 새로운 질문을 제시하며, 그 속에 끼어들어 간혹은 비평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 <아빠와 함께 떠나는 철학 여행/인북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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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졸러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놀라움으로부터 철학하기는 시작된다고 하였다. 어느 날인가 아주 평범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마음에 담아 두게 되면서부터 철학하기는 시작된다. 우리가 감탄하고 놀라며 의문을 가지는 순간부터 그것은 그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것도 당연한 것도 더 이상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단어를 하나 예로 들어보자. “부드러운 것은 정말 부드러울까?” 기차놀이를 하던 다섯 살짜리 꼬마는 갑자기 의아해졌다. “하필이면 왜 그렇게 부를까?” 또 조금은 억지스러운 깨달음도 있다. 요슈타인 가더의 청소년을 위한 철학 소설 <소피의 세계>에서 소피가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교사 알베르또에게 얘기한다. “제가 도착했을 때 선생님이 안 계신 것을 봤어요.” 알베르또가 다시 묻는다. “있지 않는 것을 너는 어떻게 볼 수 있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면서도, 우리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저 공간이 도무지 끝이 없다는 사실은 신비롭고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많은 것을 배워 알고 있는 우리 어른보다 어린이들에게 훨씬 더 자주 일어나는 이 놀라움은 무엇인가를 일깨운다. 바로 이 놀라움과 더불어 철학하기는 시작된다.
철학하기는 바로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반성이며, 그 결과물이 새로운 앎이요, 더 나은 이해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전을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철학하기의 또 다른 뿌리는 데카르트가 철학하기의 방법으로 얘기했듯이 의문을 갖는 것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그저 꿈꾸고 있을 뿐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하고 그 동안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소망이 막 이루어진 열한 살짜리 소녀는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생각과 빗나간 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자주 실망해 왔던가?
오락 영화나 기록 영화 등 화면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는 가상 현실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우리가 의심 없이 현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더욱 실감난다. 철학하기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실에 거듭해서 의심을 품는 것이고, 그저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사실의 이면에 제2, 제3의 다른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철학하기를 통하여 우리는 실질적으로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하므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학하기를 통하여 우리는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또다시 새로운 의문점을 찾아야 하며 거듭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되는 질문에 끝이 있기는 할까?
우리가 제시한 질문이 분명하고 절대적으로 객관성을 지니는 정확한 대답으로 해결된다면, 아마 우리는 정말로 철학적인 질문과 씨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질문의 한계가 계속해서 넓어진다는 것이 바로 철학하기의 매력이다. 훌륭하게 진행된 철학적 토론에서는 어떠한 사실의 새로운 측면이 부단히 나타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의 복잡미묘함과 무수한 다양성을 깨닫게 된다. 토론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전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분명해졌다는 것이 느껴진다면, 그때서야 우리는 철학하기의 목적으로서 소위 ‘분명하게 밝히기’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매일매일 하는 토론과 철학적 대화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점은, 우리가 다루는 질문 사항과 아이디어의 근본을 캐는 끈기의 정도 차이다. 친구와 수다를 떨 때는 기분과 흥미에 따라 이 화제에서 저 화제로 옮겨 다닐 수 있지만, 철학하기에서 우리는 그저 단순한 생각을 교환하는 단계를 지나서 한걸음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제시된 질문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때까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측면과 통찰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앎이 얻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도 수렴할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고, 저 자신이 보기에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다시 캐물어 볼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연결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 진정한 대화의 장이란 서로가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는 것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은 물론 시비를 가름하고 추측하며 근거를 제시해야 가능하다. 또한 새로운 질문을 제시하며, 그 속에 끼어들어 간혹은 비평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 <아빠와 함께 떠나는 철학 여행/인북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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